저는 양수혜라고 합니다

한국오픈도어 별 기고문

<제 1 화>

안녕하세요. 저는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온 양수혜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게 살고 있는 북한의 현실에 대해서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전 제가 살던 곳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곳인 줄로만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를 지금 이곳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 흙으로 돌아간다고 쓰여 있지만 북한은 흙으로 돌아가고 말 한사람을 위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생해야만 하는 나라입니다. 그 한사람을 위해서는 가족도 없습니다. 자유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없는 나라, 바로 북한입니다. 북한에서 사람은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취급되고 있다는 현실이 제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합니다.

언젠가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북한의 헛된 모든 것들을 무너뜨리실 것을 믿습니다.

 

전 오직 내 조국만을 믿었고 내 민족만을 따르면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속아 살아온 지난날들이 후회스럽기만 합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苦難-行軍)’은 북한에서 1990년대 중반 최악의 식량난으로 약 33만 명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들이 아사하자 김일성의 항일 활동 시기 어려웠던 상황을 상기시켜 위기를 극복하려고 채택한 구호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소리 없이 죽어갔던 동료들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친구들의 간절한 그 눈빛은 아직도 제 눈에 선합니다. 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19985, 전 파라티프스라는 전염병에 걸려서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 40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약 한 알조차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병에 걸린 사람들을 만티브스라고도 했는데 병을 고치려면 돈 만원을 써야만 고친다고 하여서 만티브스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전 이 병으로 인해 머리가 다 빠져 까치둥지처럼 되었고, 영양실조까지 와서 피부는 새까맣게 변해버렸습니다. 저는 이대로 죽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살아보고 싶어서 친구와 두만강 국경까지 왔지만 누구한테 함부로 중국에 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은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기 때문에 잘못 말했다가 걸려들면 수용소에 수감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누구도 믿을 수 없었기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기회를 엿보다가 물을 건너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기차를 타고 정처 없이 길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강원도 백암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어느 한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씻지도 못하고 남루한 차림으로 정신없는 사람처럼 앉아있는데 애기 엄마 하나가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 엄마가 하는 이야기가 여기에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많이 들어와서 농사일을 거들어주고 나중에 밀보리 한 배낭씩 가져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에 그곳에서 농사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몇일이 지났는데 문득 너무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 동네는 전쟁 시기에 폭탄도 한번 안 떨어졌다면서 동네가 지도에 표시도 안 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전 갑자기 내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또 몸은 너무 허약해져 있었기에 그 두려움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전 무작정 그곳을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밤이 되었습니다. 잘 곳이 없어 아무집이나 문을 두드리고 하룻밤만 자고가자고 부탁했습니다. 그곳에서 주인아저씨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환자가 있어서 안 된다고 하기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서려던 찰나 주인아저씨가 다시 부르더니 환자를 간호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전 그 물음에 즉각 가능하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그곳에서 잠을 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전 주인아저씨와 함께 장사를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부와 밀가루빵을 팔았습니다. 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같이 두부를 만들어서 장에 나가 팔았습니다. 어느 날은 다른 동네에까지 가서 팔고 와야 했는데 그곳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험난했습니다. 북한은 워낙 춥고 눈이 많이 오기에 겨울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가야만 했습니다. 때로는 짐승이 나타날까봐 지팡이를 몽둥이 삼아 들고 다녔습니다. 산을 지나다보면 뱀에 물린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아찔했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재미있었던 것은 뱀에 물리면 재빨리 뱀을 잡아서 물린 부위에 피를 바르고 뱀고기를 구워먹으면 몸에 좋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를 물었던 뱀을 잡아 껍데기를 벗기고 구워서 먹으려고 했는데 하도 먹을 것이 없다보니 그것마저도 뺏기기 일쑤였습니다. 이렇게 몇 년 동안을 남의 집 머슴살이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 소문은 중국에 가서 한 달만 일하면 장사밑천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어떻게 하면 중국에 갈 수 있을까 다시금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마음이 맞는 친구가 생겼습니다. 저는 그 친구와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국경지대로 이동했습니다. 국경지대라 곳곳에 군인들의 초소가 있고 잠복진지도 많이 있었습니다. 조금은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이겨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지역을 먼저 파악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국경 지대에서 한 아줌마를 만났고, 이 아줌마는 우리에게 중국으로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제 2 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3)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환란 속을 헤맬 때에도 놓지 않으시고 붙잡아주신 고마우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감사의 하나님 계심으로 인하여 제가 사경을 헤맬 때에도 버리지 않으시고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저는 열차사고로 인해 오른쪽 팔이 부러졌습니다. 어떻게 다쳤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다음날 저녁 강을 건너 중국국경에 이르러 한 도로를 따라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저녁 6시부터 다음날 새벽7시까지 대략 120( 47Km) 정도를 걸어서 어느 한 곳에 도착 했습니다. 자꾸만 떨어지는 팔을 붙잡고 행여나 중국국경경비대에게 걸릴까 차 진동소리가 나면 진흙탕이건 수렁이건 무조건 엎드렸다가는 다시 일어나 걷고 마을을 지나야 하면 숨소리마저도 큰 것 같아 조바심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습니다. 북한은 11월 초면 살얼음이 생길 정도로 추운데 얼마나 긴장했던지 춥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바지 가랑이가 얼어서 걸을 때마다 부직부직 소리가 나고 팔은 너무나 아파왔습니다. 길 안내 하는 분은 30( 12Km)만 걸으면 된다면서 우리를 구슬려 긴장을 놓치지 않도록 했습니다. 때로는 힘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주었지만 너무나 고통스러워 그것도 귀찮게 여겨졌습니다.

우리는 잠시 한 곳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부러진 팔을 치료하고자 했지만 팔이 부어올라 도저히 옷을 벗을 수 없어 가위로 잘라버리고 약을 발랐습니다. 우리가 머물렀던 집의 주인아저씨는 혀를 차며 불쌍하단 말만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또 다른 사람의 손에서 또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중국의 한 성에 도착했고, 저를 인도해 주셨던 분은 한족 남자 한 분을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이 제 신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등을 떠밀고서는 저를 인도해 주셨던 분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한 동안 멍하니 얼빠진 사람마냥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신랑이라는 사람은 작은 키에 너무나 초췌해 보였습니다. 내가 이제 이 사람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그러나 별 수가 없었었습니다. 이미 저를 인도해 주었던 사람들이 돈은 다 받아서 가버리고 이제 저에게는 돈 한 푼 없었습니다.

저는 무작정 신랑이라는 사람의 차를 탔습니다. 가보니 농촌의 한 마을 속에 있는 집이었습니다. 저는 거기서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의사표현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픈 표정을 지어서 제 팔의 상태를 겨우 신랑에게 알렸고, 그 사람은 제가 병원 치료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런 그가 고마웠습니다. 이제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던 그때, 저는 또다시 북한으로 이송될 위기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그곳에 머문 지 40일 만에 중국공안에게 끌려가 조사를 받고 북송을 통보 받은 것입니다. 그 후 어느 장소로 끌려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방마다 가득 차 있었습니다. 다 저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저는 강제로 끌려가기 싫어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간수가 먼저 주의를 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전에 들어온 사람들이 탈출하려고 벽에 흠집을 냈는데 벽돌을 이중으로 쌓았으니 어림도 없다면서 절대로 다른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억지로 끌려가는 것이 싫어서 어떻게 하면 탈출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마침내 탈출할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우리 방에서 밥시간이 되면 예쁜 아가씨 한 명이 나가서 식당에서 준비하고 밥시간이 끝나면 들어오곤 했는데 그 아이에게 바깥 실태를 잘 살피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는 작전을 짜고 방마다 쪽지로 작전을 전달했습니다. 그 작전은 바로 퇴식할 때 문을 열면 경찰을 때리고 키를 뺏어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조마조마하고 긴장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반대편 방에서 펑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작전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하고는 서둘러 보따리를 챙겨서 뛰쳐나갔습니다. 나가보니 밖은 벌써 아수라장이 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CCTV를 보고 변방대가 출동했습니다. 그들은 손에 전기 곤봉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꼼짝없이 잡혔습니다. 그들은 전기 곤봉으로 남자들만 기절시켰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4시간쯤 지나서 한 명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경관들이 방마다 들어와서 인원체크를 하고 한 명씩 불러내어 심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누가 이 사건을 주동했는지 추궁했습니다. 모두가 입을 다물자 남자들을 모조리 데려다가 심하게 때리고 주동자를 알아낼 때까지 고문을 가했습니다. 저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가 없어서 ‘내가 주동자다’라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방에서 제가 나이가 제일 많았습니다. 그리고 경관 3명이 밤 근무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까짓 3명쯤은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몇일 전부터 남자들을 선동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너무나도 미안하고 어떻게 할지를 몰라 더는 그들을 괴롭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저는 이사건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다고 밝힌 것입니다. 저라고 밝혀지자 설마 여자가 이런 엄청난 일을 주동했으리라 생각조차 못했다면서 나이 많은 경관 한 명이 저를 보고 대단한 여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결국 이 일로 인해 독방살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엄청난 고통의 서막이라는 사실을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제 3 화>

독방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매를 맞는 것은 물론이고, 이 사람들은 먹을 것을 잘 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제게 3일 동안 물 한 모금을 주지 않았습니다. 3일이 지나고 나서야 아침에 죽 한 그릇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먹지 못하는 괴로움보다 더한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다음 날 북한으로 이송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난 뒤 찾아온 괴로움이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짐을 싸는 내내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무장한 군인들의 감시 속에 차를 타고 함경북도 OS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갑을 차고 심문을 받았는데 그런 나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평생 잊지 못할 큰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19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보안원이 들어와서는 짐을 자기 앞에 다 풀어놓고, 옷까지 다 벗어 자기 앞에 놓으라는 것이 아닙니까설마 속옷까지 벗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이 보안원은 옷을 모두 벗은 저에게 벽에 붙어 돌아서서 뜀뛰기 20번을 시켰습니다. 그때 저는 깁스를 한 상태라 뛰질 못하니까 다리를 벌리고 앉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시킨 대로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대로 못한다고 제 따귀를 후려쳤습니다. 저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너무나도 허무하고 기가 막힌 일이었습니다.

 

나 혼자만이 아니고 다른 여자들 모두 이와 같은 어이없는 수모를 받았습니다. 우리 중에는60살 넘은 할머니도 있었는데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자기 손녀 같은 애한테 따귀를 맞고, 심한 말을 반복해서 들었습니다. 보안원이 할머니에게 이 개간나야 말 안들려? 다시 해!”라는 말을 하는데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반박했다가는 더 큰 모욕을 받고, 더 심한 구타를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밥 먹을 시간이 되었습니다. 밥 사발에 시래기 몇 가닥에 옥수수 국수 조금을 섞은 시래기죽을 먹었습니다. 난생 처음 손에 수갑을 찬 나의 모습은 한없이 초라하고 억울하기만 했습니다. 도둑질이나 강도짓 하는 사람들만 수갑을 차고 감옥에 갇히는 줄 알았는데 내가 이런 상황에 놓이니 너무나 부끄럽고, 기가 막혔습니다.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제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 들고 출근 시간이 늦을 새라 뛰어다니며 김일성 동상 청소 다니면서 김일성 10대 원칙 공부와 서사시, 신민사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던 김일성 골수분자로 손꼽히던 내가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먹을 것을 찾아 중국에 갔다가 수갑을 차게 되다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안원들이 눈에 쌍심지를 키고 돈을 찾느라고 제 짐을 뒤지기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나오지 않자 이 간나야 중국에 갔으면 돈이라고 벌어와야지하면서 바보처럼 먹기만 하고 왔다고 온갖 욕설을 퍼부어 댔습니다.

 

10일 만에 저는 OS 보위부에서 OS 점검소로 옮겨왔습니다. 차가 없어서 15리 길을 걸어서 갔습니다. 추운 겨울날 마당에 보따리를 놓고, 한 명씩 들어갔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또 다시 심문을 당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곳은 사무실이 아닌 어느 한 가정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곳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남자 경찰이 마주 앉아 심문을 했습니다. 이곳은 다름 아닌 신체검사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게 부엌으로 가서 옷을 벗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차마 눈을 똑바로 마주칠 수 없어 옆으로 돌아앉아 옷을 벗었는데 그곳에 함께 있던 아주머니가 자기를 보지 말고 경찰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남자 앞에서 옷을 벗고 서있다라는 수치심에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괴로움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신검이 끝나고 어디론가 저를 또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은 OS 단련대였습니다. 단련대라는 곳은 형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짧은 기간의 집결소입니다. 최근 중국으로부터 강제 송환되는 탈북자들의 숫자가 많아짐에 따라 감금시설이 이들을 다 감당할 수 없어 생겨난 곳이기도 하죠. 저는 이곳에서 전혀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줄여주시지 않는 걸까요? 오히려  저는 더욱 더 극심한 고통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 4 화>

드디어 저는 OS단련대로 이송되었습니다. 150여명이 30평 정도 되는 공간에 줄을 맞추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 때 단지 저는 옆에 있던 어린 아이와 소곤소곤 이야기했다는 이유로 벌을 받게 되었는데, 그 벌은 벽에 가서 이마를 벽에 다섯 번 박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도 당황스럽고 어이가 없다보니 잠시 동안 얼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있었습니다. 제 모습을 본 간수는 나와 함께 있었던 8살 아이에게 내 머리를 잡아 벽에 박아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아이는 들어온 지 20일 정도 밖에 안 되는 아이였고,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그 아이는 배고픔에 너무도 지쳐서인지 짜증이 나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간수의 명령을 듣고 사정없이 내 머리를 벽에다 박아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로 인해 나는 너무나도 억울하고 기가 막혔습니다. 사회주의가 이런 제도였구나 생각하니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감과 적개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앞으로 얼마나 더 험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두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는 모든 일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제 마음을 다잡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간수들에게서 나를 풀어줄 수도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내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제 가족과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희망은 그곳에서의 배고픔과 추위 등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잘 참을 수 있도록 힘을 더해주었습니다. 하지만 희망도 잠시, 결국 저는 풀려나지 못하게 되었고 다음 집결지인 CJ집결소로 옮겨 가야만 했습니다.

그 후 다시 HH집결소로 다시 옮겨지게 되었는데 옮겨질 때마다 전 처음 보는 남성들에게 신체검사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신검을 받으면서 옷을 벗게 되는데 그들은 그 때마다 죄수들의 옷 한가지씩을 모아다가 가지고 갔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무슨 용도로 쓰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집결소 뒤에 있는 산에서 다른 죄수들과 함께 흙을 나르고 있던 어느 날, 저녁 즈음에 한 집결소 소장이 함께 일하는 우리구역 여섯 식구들을 불러내더니 내가 낮에 일하면서 싱글벙글 웃는 모습을 못 마땅하게 여기면서 뭐가 즐겁냐고 나를 사정없이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누구한테서도 맞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억울하고 분했지만 이것을 시작으로 어디를 가든지 맞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집결소 안에는 사회안전부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특히 얻어맞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사회안전부라는 곳은 말 그대로 사회를 안전하게 하기 위한 곳이었는데 저에게서는 더 이상의 사회안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있어서 완전히 노예와 같은 노리개였으며 손 안에 있는 먹잇감에 불과했습니다.

한 달간 집결소에서 고된 노동을 끝내고 구역안전부라는 곳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오니 그 전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싸늘했습니다. 항상 옮겨갈 때마다 신검을 하게 되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한 남자가 신체검사를 하면서 아주 지독하게 진행했습니다. 그 사람은 일본 동포였는데, 바지에 붙은 단추를 보면 가위로 자르거나 목에 두른 예쁜 목도리(그곳에서 예뻐 보았자 얼마나 예쁘겠습니까?)를 보면 싹뚝 잘라갔습니다. 그곳에서의 옷에 있는 단추는 우리 몸에 옷을 단단히 싸매어 줘서 겨울에 바람이 세지 않도록 보온역할을 해줍니다. 목도리도 마찬가지로 겨울에 목과 몸을 따뜻하게 하는 절대적인 소품입니다. 이것들을 마구잡이로 잘라가 버리니 정말로 속에서 이글거리는 분노를 참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물론 화를 냈다가는 목숨도 왔다 갔다 할 수 있기 때문에 무조건 참아야만 했지요.

이런 참담한 신검을 끝내고 철문이 열려 그곳으로 들어가 보니 고무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온 곳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구류장이었습니다. 아마도 그곳은 지옥보다 더 괴롭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곳을 제가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구류장은 6명이 3줄로 양반다리를 해야 겨우 앉을 수 있는 매우 작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움직일 수조차 없이 곧은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했습니다. 구류장에 들어가는 입구부터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매우 좁았습니다. 이제부터 구류장 생활이 시작되었구나 생각하니 살기가 싫어졌고 너무나 막막해졌습니다.

3일이 지났습니다. 아줌마 한 명이 들어왔는데 깜빡 졸았다는 이유로 추운 겨울날 밤 11시에 세숫대야에 물을 떠 와서는 한사람씩 몸속으로 물을 부었습니다. 먼저 물벼락을 맞은 아이들을 보며 제 차례가 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워졌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왔고, 저는 너무 오싹해서 몸을 움츠렸습니다. 간수는 이런 저를 보며 이런 간나는 한 바가지 더 부어라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제게 물을 더 많이 부었습니다.

구류장 생활은 너무나 고독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이어지던 어느 여름 날 보름달처럼 환한 아줌마 한 분이 들어오셨습니다. 간수가 사라지자 그분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했던 저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들어오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분은 거침없이 대답했습니다. “성경책을 보았습네다

 

<제 5 화>

성경책을 보았다는 죄명으로 들어오신 그 아주머니에게 저는 성경이라는 말을 처음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성경이 도대체 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주머니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습니다. 그 아주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그럴 시간조차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주머니는 밤에 나갔다가 다음날 새벽 어느 때는 야심한 밤 2, 3시에 들어오는 게 일쑤였습니다. 눈은 퉁퉁 부어 오르고, 지친 얼굴에 눈은 항상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결국에는 달덩이같이 환했던 얼굴이 점점 초췌해 지더니 3개월 만에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구류장 8개월 동안 정말로 인간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참혹한 현실을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천장에 족쇄를 채워 묶어놓은 채로 매달아서 가느다랗고 긴 채찍으로 맞는 고문과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손은 등 뒤로 마주 잡고 1시간 동안 엎드려 있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게는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디론가로 탈출하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매정하게도 저를 놓아주지 않았고, 저는 모진 과정을 계속해서 겪어야만 했습니다.

난생 처음 재판관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을 때에는 3년 형이 선고되던 그 당시에 저는 국가소송법 117조에 입각해서 2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좁은 구류장은 벗어났지만 정말 필사적인 고통을 계속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매끼가 옥수수에 콩 몇 알밖에 되지 않았고, 국이라고 주는 것에는 무 조각 5개만이 둥둥 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배고파 뭐든 주어 먹었고, 눈에 보이는 것은 뭐든 닥치는 대로 먹었습니다.

실제로 그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질병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심한 스트레스와 마음의 고통과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매일매일 한 명, 두 명 떠납니다. 간수들이 옥수수대를 한아름 들고 들어왔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옥수수대로 시체를 둘둘 말았습니다. 끈으로 3번 정도 묶고는 3명이 그걸 들고 나가더니 바로 뭍지도 않았습니다. 3일 동안 밖에 놓아 둔 채 지켜보았습니다. 깨어 나올 수 있을까봐 그렇게 한다고 했습니다. 저희들은 교도소에서 죽으면 꽃동산, 꽃동네 간다고 했습니다.

교도소 1 9개월 기간 동안 내 옆에서 두 명이 갔습니다. 모두 영양실조로 떠났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저와 나이가 같고, 노래하는 가수였는데 배고파서 중국에 갔다가 잡혀와 3년 형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년을 못 버티고 영양실조로 떠나갔고, 저는 아직도 그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교도소에서 나가면 저와 같이 중국에 다시 가서 한복입고 식당에 가서 서빙 일을 하자고 했었는데아침 6시에 기상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이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빨리 일어나라고 흔들어도 못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피곤해서 자는 줄 알았습니다. 짜증 섞인 어조로 얼른 일어나라고 하면서 툭 건드렸는데 여전히 자고만 있었습니다. 위생원을 불러 상태가 이상하다고 하였더니 맥을 짚어보고, 눈을 뒤집어 보고, 이리저리 보더니 죽었다고 하고는 무언가로 갑자기 바쁘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죽은 사람의 짐을 챙겨가는 게 아니겠습니까. 추운 겨울에는 가죽 옷이 없는 사람들이 입을 옷이 없어 죽은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의 옷을 가지고 서로 다투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래서 그 위생원은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것만을 먼저 챙기는 그런 모습에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교도소 안의 위생시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직합니다. 그곳은 너무나도 불결하여 이, 벼룩이 판을 치고, 이와 벼룩이 옮아 놓은 옴병이 온 식구에게 퍼져서 전체가 시달립니다. 저도 옴병으로 몇 달 간 괴로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영양실조까지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제 몸무게가 25Kg밖에 되지 않았으니 제 모습이 어떠했을지는 상상이 되실 겁니다. ‘이젠 이렇게 나의 운명도 끝이 나는구나.’ 생각하니 기가 막혔습니다. 어떻게라도 살아보려고 땅에 떨어진 옥수수 한 알이라도 보이면 주어 먹었습니다. 풀을 뜯어서는 그냥 입에 넣어 먹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바로 옆에 있지만 먹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깃발이 꽂혀 있어서 그 선을 넘으면 도주로 간주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독방에 갇혀 처벌밥을 먹게 되는데 처벌밥은 직경 5cm, 높이 6cm 정도의 양입니다. 몸이 허약하다 보니 앉아 있을 기운조차도 없었습니다. 일어서고 싶어도 무릎에 힘이 빠져서 바로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앉아있어도 꼬리뼈가 너무 아팠고, 그렇다고 누우면 딱딱한 바닥에 뼈가 부딪혀 잠잘 때도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사람의 형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다리는 벌어지고, 얼굴은 뼈만 남아 해골 같았고, 어깨 뼈가 돌출되었고, 걸을 때는 헛발질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이러다 언젠가는 죽겠구나 생각하는데 교도소 죄수 전원을 집합 시켰습니다. 그곳에서 조국 해방 55주년 기념으로 출소를 시켜주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간다 해도 저를 맞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족이 있고, 형제가 있는 사람들은 교도소에 와서 먹을 것도 주고, 갈아 입을 옷도 가져다 주지만 저는 그럴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가는 것이 이곳에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필요한 서류를 작성했습니다. 그 서류는 교도소 안에 있는 모든 일을 비밀로 하겠다는 서약서였습니다. 그곳에 손도장을 찍고, 드디어 출옥하였습니다.

 

<제 6 화>

드디어 출옥을 하고, 자유의 몸이 되니 한없이 좋았습니다. 총구 밑에서 노예처럼 살던 쓰디 쓴 지난 날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식당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아니, 허기진 배부터 채우고 싶은 나머지 몸이 저절로 그렇게 반응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땐 체면도 없었습니다. 무조건 식당에 들어가 먹을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남루한 차림으로 거지 꼴을 한 저를 보고 기가 막혔던지 주인이 국수 한 그릇을 내주고는 먹고 얼른 사라지라고 했습니다. 제가 국수를 다 먹자마자 저를 내 쫓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면서 가게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교도소 옷은 목에 카라가 없습니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이름과 번호를 써서 붙었습니다. 저는 그 옷을 그대로 입고 돌아다녔습니다. 신발은 남자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한쪽은 검정색, 다른 한쪽은 흰색이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었겠습니까. 이런 차림으로 엄마를 찾아가기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보려면 언니네 집으로 가야 하는데 형부랑 조카를 보는 것도 너무 민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을 접고 아들이 다니는 유치원을 찾아갔습니다. 저는 아들을 보기 위해 장마당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잤습니다. 아들을 볼 수 있다는 설레임과 기쁨에 밤의 냉기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꿀 같은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냇가에서 세수를 하고 유치원 정문 앞 한쪽 구석에 앉아서 들어가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보았지만 아들이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오는 애들도 있고, 엄마 자전거 뒤에 타고 오는 애들도 있고, 혼자 오는 애들도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담장 너머로 음악에 맞춰 아침 체조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교실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보고 돌아서는 부모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마지막까지 애들의 모습을 다 살펴 보았지만 끝내 아들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아들을 꼭 봐야 하겠다는 생각에 주저 없이 교실로 찾아 들어 갔습니다. 마침 어린 아가씨가 복도에 있기에 내가 박성광이 엄마라고 하자 바로 알아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저에 대한 소문이 퍼져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알고 있었기에 이 아가씨도 저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던가 봅니다. 아가씨는 한 아이의 손을 잡고 왔습니다. 그 아이가 성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저도 못 알아보고, 그 아이도 저를 못 알아봤습니다. 자세히 보니 이 아이의 볼에는 보조개가 있었습니다. 제 아이가 분명했습니다. 순간 울컥 했지만 남루한 차림에 울기까지 하면 더 초라해 보일 것 같아 눈물을 꾹 참았습니다. 그런데 제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들고 있는 주머니를 보니 안에 학습장과 연필 한 자루가 들어 있었고, 자그마한 살구씨 주머니가 들어있었습니다. 이것은 유치원 아이들까지 외화벌이에 내 몰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때 유치원 선생님이 수업 시간이 늦었다면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 버렸습니다. 저는 한동안 뒤를 바라보다가 밖으로 나와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불과 10,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실컷 안아도 보고 싶었고, 볼도 비벼보고 싶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고도 싶었지만 참혹한 현실은 끝내 아들과 엄마를 멀리 멀리 이별의 길로 갈라놓았습니다.

2번 째 북송 되었을 때 담당 보안 지도원이란 사람이 아들에 관한 조회 결과를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결과를 듣고 당장에라도 죽고 싶었습니다. 아들은 결국 시장 바닥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가 시장에서 죽었다니저는 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속에서 돌덩이가 떨어지는 마냥 쿵 하면서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애 아빠가 새살림하면서 애를 시어머니에게 맡겼는데 시어머니는 애를 애육원이란 곳에 보냈습니다. 애육원에서도 아이의 자그마한 배를 채워줄 수가 없었기에 다시 시집으로 보냈지만 시어머니의 욕설과 함께 다시 애육원에 끌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이 애육원이지 배고픔에 지친 아이들은 성격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고, 힘이 세거나 나이가 많은 아이들은 힘이 약한 아이들의 밥을 뺏어 먹고, 왕따시키고, 그야말로 깡패들의 소굴이었습니다. 또한 시설이 너무나 열악하여 아이는 그런 환경이 싫어서 할머니를 찾아간 것이었는데 받아 주질 않자 갈 곳은 시장 밖에 없었습니다. 제 아이는 꽃제비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몇 년 만에 모습을 보인 엄마란 사람은 신발 색깔도 맞지 않고, 남루한 모습의 거지꼴이었고, 아빠란 사람은 다른 여자하고 살림을 차리고 있었고, 할머니는 이런 우리 아들을 외면하고야 말았으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엄마가 늘 안아주고 밥을 차려 먹이고, 사랑을 베풀어 줘도 그 사랑에 만족치 못하여 방황하는 아이들도 있는 판인데 내 새끼가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해 허기진 배를 움켜 쥐고 시장 바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니 하늘이 원망스러웠고, “이와 같은 세상 더 살아 무엇하리란 자책감과 죄책감으로 저는 매일 불면증에 시달리게 됐습니다. 어찌어찌 하여 잠이 들면 누워있는 그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흐르는 눈물로 베개를 적시다가 잠이 든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